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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오늘의 우리만화 <똑 닮은 딸> "완벽을 향한 욕망과 과잉된 자의식이 자초한 비극 " 홍난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2024.11.15
완벽을 향한 욕망과 과잉된 자의식이 자초한 비극
<똑 닮은 딸>, 이담, 네이버웹툰
엄마가 동생을 죽인 것 같단 기시감이 확신으로 돌아서면서 소명은 엄마 앞에서 거짓된 가면을 쓰고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 아직 10대인 소명에게 엄마는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에 엄마가 동생을 죽인 살인자라는 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진실이다. 진실을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임을 자각하자 소명은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 엄마한테 다 돌려줄 거라는 복수를 다짐한다. 모녀간의 지독한 갈등을 그린 <똑 닮은 딸>은 변명의 여지없이 악으로 등장하는 명소민의 악행에 당위성을 부여하거나 옹호하지 않으면서도 평범한 사람들도 공감할 법한 삶에 대한 회의, 통제감 상실과 같은 좌절감에서부터 악행이 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공감과 연민, 공포와 안도의 카타르시스를 충족시킨다. 악한 엄마 명소민과 이에 대항하는 딸 길소명의 대결에서 길소명이 매번 굴복할 수밖에 없는 힘의 불균형을 전제하면서도 극의 긴장감이 유지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똑 닮은 딸>에서는 명소민의 인생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과잉된 자아의 나르시시즘이 주변을 파괴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 일류 대학을 나온 명소민은 전도유망한 성형외과 의사와의 결혼, 유학을 거쳐 교수가 되었다. 딸 길소명과 아들 길명진을 낳으며 완벽한 삶을 사는 것 같더니 돌연 남편이 행방불명되고 아들마저 세상을 떠난다. 혹자는 겉으로 드러난 것들만 보고 명소민을 안타깝게 여길 테지만, 그녀 주변에서 일어난 비극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이 필연은 모두 명소민이 자초한 것이며 명소민은 반복된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누군가를 통제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아왔다. 류솔은 명소민이 통제 대상으로 삼은 첫 번째이자 대표적 인물이다. 통제할 수 있단 과잉된 자신감에 빠져 자신의 뜻대로 옭아매지만 류솔은 번번이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명소민은 원하던 욕망이 실패로 돌아가자 수치심과 자기연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류솔을 살해하는 악행을 저지른다. 명소민의 입장에서 친구인 류솔, 남편 길규온, 아들 길명진은 애초에 글러 먹은 사람이어서 죽어도 아쉬울 것 없는 존재다.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타인의 탓으로 돌려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명소민의 뒤틀린 마음은 한계를 모른 채 뻗어 나가 보는 이들을 더욱 불안하고 두렵게 만든다.
『과잉 존재』를 쓴 김곡은 ‘언제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망각하는 새로운 시대 증상’이 ‘과잉’이며 자의식이 과잉되어 부풀어진 사람들을 ‘경계를 잃고 비대해진 자아의 종말’이라 일컫는다. 명소민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뒤틀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꿈꾸는 완벽이란 욕망은 불가능한 목표이며 한계가 없어서다. 명소민의 행동은 언제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몰라 경계를 잃고 비대해졌고 남은 건 실패에서 온 수치심이며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타인에게 투사(projection)한다. 타인에게 투사하는 순간 실패와 수치심은 사라지기 때문에 명소민의 한계 없는 갈망의 필연적 결과는 살인이다. 끝이 없는 완벽에 대한 욕망에 집착하는 명소민은 그야말로 과잉된 자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명소민은 자신의 삶이 완벽에서 멀어지자 똑 닮은 딸 소민을 통해 완벽한 삶을 대리 실현하려고 애쓴다. 소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방해요소라고 파악된 서남수를 제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당연한 결과로 명소민이 길소명과 주변을 통제할수록 모녀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진다. 명소민의 눈에는 변화하기에 글러 먹고, 부족하기 그지없어 악행의 타깃이 된 사람들이 길소명의 눈으로 보기엔 “자기가 뭘 실수했는지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소명은 엄마를 용서할 수 없고, 자신이 실수한다면 언제라도 엄마에 의해 제거될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길소명은 명소민이 바라는 완벽한 딸이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파괴해서라도 복수하겠단 다짐을 감추며 사는 것이다.
모녀 갈등의 대표성을 띤 이야기로 소포클래스의 비극 <엘렉트라>를 들 수 있다. 엘렉트라의 아버지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큰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쳤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한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자 무참히 살해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살인의 이유를 남편이 딸을 희생시킨 탓이라며 살인을 정당화하지만 이에 맞서는 엘렉트라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정당화하려는 엄마와 복수하려는 딸의 관계가 <똑 닮은 딸>의 명소민과 길소명을 연상하게 한다. 반면, <엘렉트라>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엘렉트라가 겪는 갈등이 아가멤논의 선대에서부터 이어지는 저주와 연속된 복수의 결과이며 예견된 비극이란 점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똑 닮은 딸>의 갈등은 명소민은 스스로 모든 일을 자초했단 것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 비극은 인간이 피하고 싶은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끝내 피하지 못하는 무력함과 불완전함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고결한 인간의 조건을 깨닫게 한다. 시시포스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서도 그러한 교훈을 얻는다. 시시포스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기에 힘들여 올려놓으면 다시 아래로 바위가 떨어져 끝나지 않는 형벌에 갇혔다. 인간으로서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한 시시포스가 의미 없이 반복되어 허무를 불러일으키는 형벌에 갇힌 것은 다르게 이해하면, 반복적인 인간 삶에 의미를 잃은 시시포스였기에 가진 불가능한 욕망이며 불가능한 욕망의 끝은 다시 반복된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 신화가 우리에게 주는 여러 가지 교훈 중에서, 반복되고 공허한 삶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살아냄으로써 되레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똑 닮은 딸>의 명소민이 받아들여야 할 인간의 조건이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처럼 살지 않겠다고 떠돌지만 테베의 왕이 되면서 결국 운명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음을 확인한다. 벗어나려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자신의 눈을 찌른 채 테베를 떠나는 오이디푸스의 결말을 보며 우리는 도리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낸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고통을 감내하고 자신의 행동에 속죄하고 책임을 다해 살아내는 오이디푸스를 통해 얻은 삶의 가치다.
명소민에겐 없지만 오이디푸스에게는 있는 것, 그리고 시시포스 신화가 주는 메시지는 ‘인간의 무력함과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이다. 즉, 내가 불완전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받아들이고 반복되고 무료한 일상이라도, 때로는 고통스러워도 감내하고 살아냄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명소민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감내해야만 경계 없이 날뛰던 과잉된 욕망은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며 소명이 자신을 파괴하는 비극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혹은 명소민이, 자신의 입버릇처럼 변할 수 없는 글러 먹은 인간이라면, 마치 자신인양 투영한 똑 닮은 딸 소명이가 파괴되더라도 성찰 없이 남 탓만 반복할지도 모를 일이다.
<똑 닮은 딸>은 완벽함에 몰두한 나르시시스트 명소민의 악행을 빌어 예기치 않게 벌어진 문제를 깨끗이 삭제해 버리고 싶은 충동과 그것을 대리 실현함으로써 얻는 통쾌함과 쾌감이 종국에는 우리의 삶을 더 무의미하게 만들고, 문제를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살아내는 것이 우리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만든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 속 부조리를 직시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읽고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홍난지(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