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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순정’ 기획전 전문가 리뷰5-<한혜연 작가>-청강대 만화콘텐츠스쿨교수 홍난지

2023.01.16

나와 너, 우리를 이해하는 변화의 기록과 감정의 기억, 한혜연 단편집

 

 

우리는 기억이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좋았지’, ‘슬펐지와 같은 감정의 기억을 사실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겪은 과정은 모두 감정 속에 아로새겨져 오래 기억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감정의 기억을 진실이라고 믿고 문득 꺼내어 들춰보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또 한때는 죄책감이나 미움에 사로잡혀 현재의 나를 힘들게 만들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복잡하고 미묘하며 주관적이기에 미성숙한 우리를 더욱 불완전하게 만들지만 그것이 내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임을, 내가 살아있다고 증명해줄 것임을 안다. 그래서 소중하고 아프고 아름답고 슬프다.

 

달콤 쌉쌀한 감정의 기억

아이에서 어른이 될 때 우리는 짧고도 긴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 속에는 아이였을 때 감지하지 못한 예민함과 예민함에서 포착되는 일상의 작은 균열이 감정의 파동을 일으켜 난생 처음 가보는 낯선 공간에 갇힌다. 그 공간을 무엇으로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외로움, 집착, 공허함 등의 감정이 교차하는 그곳에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 사랑과 우정이 덧붙여질 때 그런대로 괜찮다는 가치를 갖는다. 참을 수 없이 슬픈 감정도 이면에는 정화의 순간이 있듯이 달콤한 일상이 달콤하지만은 않다는 것, 한혜연의 작품에서는 정의 내리기 어려운 과잉된 감정의 정체를 펼쳐 보여준다.

 

<어느 특별했던 하루>

사랑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 그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결핍을 발견한 순간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실체를 드러낸다. 도희는 열등감을 들춰내게 만드는 전학생 정연이 미웠다. 도희가 정연과 우연히 전철역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특별히 기억할만한 하루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쉽게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들이 널을 뛰듯이 도희나 정연에게 오래 지속될 관계는 물거품 같이 여겨진다. 도희가 생각하는 정연은 모든 것이 완벽해서 관계에서 오는 외로움 따위는 없을 거라 예상했는데 정연에게도 비슷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미움이 이해로 바뀌고, 이해할 수 있던 하루의 기억은 짧은 관계 속에서 지친 두 사람에게 오래 기억될 추억이 된다. 미움으로 물들 수 있던 청춘의 한 페이지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하루로 인해 아름답게 윤색되는 과정이 <어느 특별했던 하루>에 서려 있다.

 


 

 

<149>

특별하지 않은 나와 대비되는 친구, 그러나 그들과 나는 충분히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자각은 <149>에도 드러난다. 같은 학교, 같은 반이어도 마음을 나누기 전까지는 타인이니 쉽게 판단하고, 동경하고, 공감한다. 이러한 마음을 느끼는 이유는 정체성이 확립되는 과정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진아는 1등인 하나와 꼴등인 지현이 절친한 친구라는 사실에 의문을 갖고 있다. 성적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모두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친할 수 있는 접점이 없을 것이란 생각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하나와 지현이 수학여행 때 가져온 지나치게 커다란 짐, 그들이 큰 짐을 들고 홀연히 사라진 것을 본 목격자 진아는 6년 후 그들을 우연히 만난다. 다양한 사정과 성격, 개성을 무시한 채 성적으로만 가치 매겨지는 학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하나와 진아는 사라지는 것을 택했다. 진아는 하나와 지현을 타인으로 지켜봤지만 그들은 공감대를 갖고 이해할 수 있는 친구였다는 사실에 대해 6년이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그리고 하나와 지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의 정체도 알게 되었다. 미련 없이 떠나는 그들에 대한 동경과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란 두려움. 우리가 공감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 두려움은 성장이란 과정을 지나고 있는 우리의 내·외부에 존재하고 있음을 <149>에서 알려준다.

 

<자오선을 지나다>

우정과 사랑을 지속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해물은 그가 사는 현실과 연계되며 곳곳에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관통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자오선을 지나다>에서는 박이경, 이정숙, 두 주인공 사이의 우정과 사랑이 사회 변화에 따라 어떻게 운명이 달라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린 박이경의 재능을 일찌감치 눈치 채고 곡을 붙여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이정숙은 한국전쟁 이후 월북하면서 이경과의 인연이 끊어진다. 그들이 서로에게 보낸 신뢰가 예기치 못한 전쟁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정과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아 서로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고 사라졌다고 볼 수만도 없다. 그들이 여러 해 동안 나눈 공감과 위로로 쌓아 올린 신뢰는 이경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정숙과 이경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도 이념도 그들의 마음까지 파괴할 수는 없던 것이다. 비록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 우정과 사랑이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변했을지라도 말이다.

 

꽃잎이 꽃의 전부가 아니란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다. 꽃잎이 져도 씨앗은 자라고 돌아올 다른 봄날에 피어날 수천의 꽃들이 그 안에 있단다. 그러니까... 꽃잎이 진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무엇이 진짜인지, 사실인지를 증명하는 것보다 때로는 느낀 감정의 실체가 진실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비가시적인 감정의 기억으로 삶의 과정을 통과한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고, 자신과 삶의 정체를 깨닫는다. 남이 보는 내 모습이 나의 전부가 아니듯 내가 아는 누군가의 모습이 그의 전부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삶을 정의 내릴 순 없다. 이 모순을 알고 받아들이며 우리는 삶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며 타인을 이해한다. 그 과정에는 우정과 사랑, 신뢰가 뿌리를 내린다. 많은 가지로 펼쳐지며 삶을 다채롭게 물들일 수 있게 우리는 그 뿌리에 의존해야 한다.

 

한혜연이 표현하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감정과 상상력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힘들테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삶이란 걸 문득 떠올릴 수 있도록 이해와 공감, 우정과 사랑을 나눌 기회를 놓지 말라는 따뜻한 조언이다. 예민하고 섬세한 눈으로 누구를 탓하거나 슬퍼하거나 미워하지만 말고 지금 현존하는 스스로에게 집중하라고, 베일에 싸여 있는 내밀한 감정의 정체를 들여다보라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꽃잎이 진다고 슬퍼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그의 단편 속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