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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순정’ 기획전 전문가 리뷰4-<최인선 작가>-만화평론가 서은영

2023.01.16

뫼비우스의 띠의 역설

 

 

 

어쩌다 읽게 되는 가십성 뉴스들이 있다. 최근 읽었던 뉴스는 한 신혼부부의 어릴 적 사진에 얽힌 내용이었다. 첫눈에 반한 연인은 짧은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했다. 어느 날 신혼부부는 어릴 적 사진을 정리하다 깜짝 놀랄만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십 수 년 전, 부인의 어린 시절 사진 속에서 어린 남편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둘은 결혼하기 얼마 전에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십 수 년 전에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붉은 실의 연이 오래전부터 이들을 연결해오고 있었다는, 그래서 더욱 사랑이 깊어졌다는 가십성 기사였다. 유의 깊게 읽은 게 아니라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소중한 인연의 만남은 어디에서든 이루어질 수 있으니 부디 주변을 잘 살피길 바란다”.

서두가 길었다. 그런데 최인선의 단편 몇 편을 읽다 보니 불현듯 몇 년 전 읽었던 그 인연의 관한 기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냐면 그 기사를 읽은 후 나는, 시야를 조금 더 넓게 보려 애썼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시야를 넓히게 되면 공간이 확장되고, 공간이 확장되면 초점도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기자의 조언처럼 나는 주변을 살피기시작했다.

최인선은 주변을 살피는 작가다. 그녀의 작품을 읽고 있자면 이렇게까지 시야를 넓힌다고?’라며 깜짝 놀라곤 한다. 그녀는 미처 남들이 보지 못했던 구석구석을 살피는 작가다. 이런 최인선의 단편들을 한 단어로 집약하면 공간이다. 최인선은 한 공간의 시점들을 다초점화함으로써 공간을 확장하고, 연결한다. 다시, 그는 공간을 시간과 연결해 무의식(비현실)과 의식(현실)의 세계를 넘나들며 잇고, 때로는 시간의 넘나듦을 공간으로 표현한다.

 

공간은 이어지며, 확장된다.

 

우리는 한 공간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은 오로지 하나라고 오해하곤 한다. 독자는 주인공의 시점을 따라 사물, 사건, 대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덕분에 유일한 하나의 초점만을 가진다고 여기기 쉽다. 인간의 눈은 유한하고, 우리가 지켜보는 프레임들-, , , 스크린 등- 역시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혼부부의 오래된 인연을 소개한 가십성 기사처럼 우리는 흔히 나의 시점에서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기에 그 주변, 이면을 놓치곤 한다. 나의 프레임 안에는 나 이외의 타자들에 대한 시선이 스며들지만, 좀처럼 눈치 채지 못한다. 한 공간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지배하는 시점은 단일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여기, 마로니에 공원에 나무를 에워싼 의자가 있다. 의자에는 친구 사이인 남성 두 명, 또 다른 친구 사이인 두 명의 여성이 있다. 그리고 의자 위 나무에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던 애벌레가 있다. <마로니에 공원> 연작에서 나에게 오랜 시간 여운이 남았던 작품은 <상황3>- 애벌레의 시점이었다. 나무 위에 살던 애벌레는 배가 고팠다. 엄마 나비가 기다리라며 먹거리를 구하러 자리를 뜬 사이, 애벌레는 나무 아래 의자에서 뻥튀기를 발견한다. 배가 고팠던 애벌레는 참지 못했다. 열심히 꿈틀거리며 나무를 기어가고 또 기어가서 드디어 뻥튀기가 붙어 있는 그녀의 뺨에 도달했다. 그런데 식욕을 만끽할 새도 없이 무지막지한 남성의 손이 날아와 뺨을 쳤고, 애벌레는 땅으로 나뒹굴었다. 애벌레가 떨어지자 어딘가에서 날아든 새가 애벌레를 낚아챘고, 치한을 물리치겠다며 돌진하던 실연남은 상황파악 후 머쓱해진 상태로 여성들을 지나쳐 갔으며(<상황1>에서 남성의 시점), 어미 나비는 공중에서 애벌레를 애타게 찾고 있다.

한 공간에서 세 개의 상황이 동시에 발생했다. 최인선의 <마로니에 공원>은 이것을 <상황1>, <상황2>, <상황3>의 연작을 통해 세 개의 시점으로 펼쳐 보여준다. 한 공간에서 착각과 오해로 빚어낸 상황을 각기 다른 시점에서 다룸으로써 놓칠 뻔했던 주변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의 프레임으로만 작동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공간을 다초점화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인선은 여러 개별자들의 공간과 시간을 살핀다. 같은 시공간에 머물지만 각기 다른 개별자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작가가 공간을 확장해 시야를 확보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것은 타자를 발견하고, 타자에게 관심을 두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연극 중에 다초점극이 있다. 어두운 무대 위에 조명이 비추는 인물에게 초점이 맞춰지면 무대 밖 관객들은 그의 이야기만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눈은 내 것이지만, 주체의 능동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무대형식이라며 비판받았다. 다초점극은 무대 위에 여러 개의 광경이 한꺼번에 펼쳐지도록 만들어 관객이 원하는 무대를 선택하도록 자율성을 제공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관점)이 다양할 수 있으며, 보이는 대상의 이면에는 또 다른 진실이 존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관객에게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할 시선을 누릴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고,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관객을 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기조를 창출한 것이다.

이렇듯 최인선은 공간을 다초점화함으로써 개별 시간자들의 존재를 발견하고, 사물의 이면을 탐구하고, 천착한다. 이로써 마로니에 공원 어느 나무 그늘 벤치에서 동시간대에 일어난 사건은 하나가 아니다. 초점을 어디로 둘 것인가에 따라 사건의 진실이 달라질 뿐이다. 결국 그녀에게 공간은 진실에 대한 탐구이자 세계의 확장이며, 종이 지면과 칸이라는 유한한 공간(형식)을 해체해 무한한 스토리를 다시 쓰는 행위이다.

 

공간에 갇히다

 

최인선의 작품은 유독 공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공간은 장소(the place)가 되기도 하지만, 시간을 나타내기도 하고, 인간을 구성하기도 한다. 그녀의 작품은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수시로 넘나든다. 단순히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공간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마치 최인선의 데뷔작인 <뫼비우스의 띠>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데뷔 때부터 줄곧 어떤 이어짐의 세계를 무한히 상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십 원>, <춘몽>, <무풍지대>, 연작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최인선의 공간을 잘 보여준다은 공간과 시간의 연결을 잔인한 현실의 상상력으로 표현했다, -시간>,  <fictio->의 연작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최인선은 인간을 공간으로 지칭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들은 이 공간들을 조정하며 존재한다. AM(오전), PM(오후)으로 구분된 시간들은 공간(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서 끊임없이 작동하며, 꿈과 현실을 조작한다. 시간은 24시간 내내 인간에게 딱 달라붙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므로, 결국 시간은 공간을 지배한다는 논리다. 그녀가 왜에서 시간이 인간을 공간으로 지칭했는지 설명이 된다. 곧 최인선 작품에서 비가시적인 시간이 가시화된 형상이 바로 인간이라는 공간이다. 그리고 이 공간들은 얽히고 설켜 타인의 시간을 지배하고 침범하며 또 다른 공간으로 확장된다. 시간이 공간을 침범하고, 공간이 또 다른 공간을 침범하기 때문에 단일한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십 원>은 십 원짜리 동전을 훼손하는 일을 즐기던 소년이 결국 동전 안에 그려진 다보탑에 갇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군사정권 시절, 십 원짜리에 그려진 다보탑에 불상을 새겨 넣으면 대통령이 된다던 도시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국민학생들도 알 정도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도시 전설 속 다보탑은 누군가에 의해 주술적인(비현실)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엄마의 훈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전을 훼손하던 저 소년은 놀이터에서 다보탑의 공간으로 이동해버렸다. 소년에게 내려진 형벌이었을까. 어찌 됐든 소년은, 일상의 공간(놀이터)에서 비현실의 공간(다보탑) 안으로 갇혀 버렸다.

 

  

 

이 외에도 게임 속 캐릭터에게 패한 주인공이 오락기 안에 갇혀 버리는 <무풍지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의 이어짐으로 끝이 없는 수험생활에 갇혀 버리는 <한여름 밤의 꿈>,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지, 내가 개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춘몽> 등 최인선은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런데 경계 없이 연결된 이 공간들은 불행히도 행복하거나 아름답지 않다. “지독한 꿈이다. 다시는 꾸지 말아야 할텐데...”라는 <춘몽>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다. 대체 어떤 꿈이 악몽인지 알 수도 없지만, 이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둘 다 지독한 꿈이기 때문이다.

최인선의 작품을 관통하는 냉소와 인간에 대한 불신은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몇 번이고 자리(공간)를 옮겨봐도 여전하다. 특히 작품마다 반복해 등장하는 나선형의 기호들은 도무지 끝이 나지 않는 공간의 이어짐을 형상화한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지 못할 공간이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그 속에서 몇 번이나 잠을 깨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 갇혀 버린 것만 같다. 마치 미로처럼.

 

삐딱하게...

 

최인선 작품 속 인물들은 부러 삐딱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무능한 백수여도 무위도식을 꿈꾸며 가겟집 노인을 속이는 도식이와 무능이(<무위도식 무위무능>), 심사가 꼬일 대로 꼬여 취업한 친구를 비꼬는 백수(<춘몽>), 연인에게 구두쇠처럼 굴다 실연당하고 돈은 돈대로 잃어버린 찌질남(<찢어지게 가난한>), 불륜으로 임신한 상간녀에게 중절수술을 강요하면서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보며 미소 짓는 체육선생(Fiction)까지 그녀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선한 캐릭터를 찾아보기 힘들다.

비열한 방법으로 경쟁자를 물리쳐 좁은 문(자궁을 거쳐 질까지)을 통과한 의 아이를 보고 있자면, 작가는 최소한 성선설 정도는 부인하는 것만 같다. 그녀의 작품 속 아이들 역시 천진하거나 순진과 거리가 멀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엄마에게마저 버림받는 가련한 아이인 <건망증>의 인수마저 기대를 배신한다. 인수는 늘 주눅 들어 있지만, 우연히 발견한 상점 안 할머니에게는 가져 갈 거야 할망구야를 거침없이 내뱉는다. <십 원>의 남자아이는 십 원짜리 동전을 훼손하며 사형시키겠다고 거칠게 말한다. 작품마다 인물들이 지어내는 특유의 표정은 한마디로 띠껍다’. 인물들은 한쪽 얼굴을 있는 힘껏 일그리고, 온 힘을 다해 치열을 드러내며 분노나 비열함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표출한다.

최인선 작품 속 인물들은 애고 어른이고 간에 비주류들이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딱히 좋을 것 없는 악몽 같은현실과 비현실이 이어진 뫼비우스의 띠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다. 그 모습이 위태롭게 느껴져 연민을 가질라치면 어김없이 드러나는 인성에 없던 정도 거둬버리게 만든다. 그런데 특유의 띠꺼움을 보이는 장면에서 이들은 만화의 칸 안에서 정면을 응시하며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은 마치 칸 밖의 세상을 향해 침을 하고 뱉을 것만 같다.

냉소와 냉담. 어느 공간에 있어도 가시지 않는 불안과 방황. 최인선의 작품 속 인물들은 완벽하다고 회자되는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완벽한 공간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보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안주하지 못한다. 결국 불신이 가득한 세상에 대한 시니컬한 반응은 인류 종말의 예언과 파국이 횡행했던 1990년대 세기말의 시대를 살아가던 청년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