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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순정’ 기획전 전문가 리뷰3-<이향우 작가>-만화평론가 성상민

2023.01.16

세기말, 한국 만화에 우주인이 나타났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여성만화를 표방한 서울문화사(, 서울미디어코믹스)의 월간 만화잡지 <나인>에 연재된 이향우의 <우주인>은 그야말로 세기말 지구에 내려온 우주인같은 느낌의 만화였다. 주인공에게는 별다른 삶의 의욕이라고는 딱히 보이지 않고, 하루하루를 대충 살아가기에 바쁘다. 주인공의 일상에는 소소한 사건들이 있지만 일상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큰 사건이라 하기에는 어렵다. 일상적인 순간에서 시작했던 작품은 완결되는 순간까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은 채 그렇게 마무리된다.

 


 

<우주인>의 이러한 연출 요소들은 2022년 현재에는 일상툰또는 에세이 만화라는 명명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익숙해진 것들이지만, 최소한 1999년에는 결코 흔한 스타일이라 말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물론 그 무렵에도 작가 본인의 만화가 생활을 바탕으로 만든 김나경의 <사각사각>, 단순한 후기 만화 이상으로 작가의 일상생활을 꾸준히 연속적인 작업으로 만들어 냈던 권교정의 의 의 Real Talk> 같은 작품이 있었다. 하지만 <사각사각>이 좀 더 코미컬한 요소가 강했고, 권교정의 Real Talk> 작가 자신의 생활을 만화로 옮겨낸 스타일에 가까웠다면 <우주인>은 간간히 등장하는 코믹한 연출을 제외하면 완연하게 장르적인 강조점이 두드러지지 않으며, 작가 본인의 삶이 아닌 가상의 등장인물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당시의 비슷한 작품들과도 또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으로 <우주인>은 이향우가 이전부터 조금씩 시도하던 느릿한 감각으로 여며진 만화의 결정체와도 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이향우가 1998년에 펴낸 첫 단행본이자 연작 단편집인 〈One Thousand Miles>는 마치 환상동화와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작은 마을에서 유리창 청소부로 살아가는 소년 솜 스폰지는 어느 날 갑자기 몸이 커지게 된다. 어른이 되었다 하기에는 몸이 커진 것 말고는 특별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사람들만 사는 나라에서 자기 혼자만 몸이 커진 바람에 이전처럼 창을 닦을 수가 없게 되었다. 솜 스폰지는 자기의 몸을 원래대로 돌리기 위한 여정에 나사고, 그 과정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알 수 없는 계기로 주인공의 신체가 갑작스레 커지고, 여행을 떠나면서 만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지점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받았을 영향이 느껴지면서도 이를 풀어내는 리듬은 무척이나 차분했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이들은 현대 사회에 찌든 사람들을 풍자하고 있지만, 자극적으로 이들을 부각하는 대신 환상동화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세심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다뤄내고 있었다.

와 같은 해에 출간된 이향우의 두 번째 단편집 <은복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인>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은복이>의 주인공 은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여고생이다. 키도 몸무게도 평범하며, 몸매 역시도 마른 것을 빼면 큰 특징이 없다. 얼굴이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고, 공부도 그렇게 잘하지는 못한다. <우주인>과 비슷하게 주인공의 크게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비추는 <은복이>는 대신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드러나는 주인공의 새로운 면모를 통해 작은 서사를 구축했다. 얼핏 보기에 은복은 크게 튀는 부분도, 모난 부분도 없이 평범한 아이 같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섬세하고, 사려 깊은 아이이다. 아무런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그저 그렇게 보내는 것 같아도, 사실 은복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상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은복은 그 상처에 주눅 들지 않고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렇게 이향우는 두 편의 단편집을 통해 당시 흔치 않았던 일상의 단편을 드러내는 서사, 그리고 가는 선과 간결한 명암 표현, 그리고 1990년대 당시 흑백 만화가 주류를 이룰 때에는 드러낼 기회가 많지 않았어도 표지 일러스트나 삽화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드러났던 파스텔톤의 채색이 조화를 이룬 자신만의 그림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주인>은 이향우가 이전 발간한 이 두 편의 단편집에서 시도한 결과물들이 하나의 성취를 이룬 작품이었다. <우주인>의 주인공은 우주인이다. 정말로 우주에서 내려온 미지의 존재가 아니라 성은 , 이름은 주인인 정말 이름이 우주인인 여성이다. 하지만 주인공 우주인은 때때로 정말 우주에서 온 게 아닌가 싶은 면모들을 보여준다. 분홍색의 긴 파마머리를 지닌 우주인은 특별한 직업 없이 오전 8시부터 밤 12시까지 자유 시간을 구가하는 백수이다. 하지만 딱히 자신이 백수라는 것에는 별로 자격지심이나 초조함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느긋하게 즐기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은 평소에 그다지 말을 잘 하지 않는 과묵한 성격이지만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주먹까지 휘두를 정도로 단호하게 내치고, 마음 안에 들어온 것은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이는 무심한 듯 시크한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악연으로 만난 주변 사람들과 어느덧 가볍게 술까지 마실 정도로 친해지는 독특한 친화력까지도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0년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서야 볼 수 있던 캐릭터의 성격이 <우주인>에서는 이미 등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 작품이 처음 연재된 시기가 한창 IMF 경제위기의 절정에 놓여 있던 1999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주인공의 모습은 단순히 작가의 취향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개인의 의사에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하루하루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백수가 되기 딱 좋은 때였다. 직장을 구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이들이 경제적은 물론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적 맥락을 같이 들여다보면 <우주인>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이향우 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만들어 낸, 1999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20세기 말 한국에 찾아온 초유의 위기를 그럭저럭 버티며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마치 이전 단편집에 등장한 주인공들이 저마다의 고민을 하면서도, 그 고민에 짓눌리지 않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나갔던 것처럼 말이다.

직장이 없어 집에서 빈둥거리는 삶을 자신에게 주어진 긴 자유 시간으로 생각한다. 마냥 자신감으로 넘치지는 않더라도 남들에게 주눅 들지 않는 자세를 보인다. 자신이 살아가는 동네에서 마주치는 이웃 사람들과 길고 느릿한 관계를 보내며 공동체를 구축한다. 그렇게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하루하루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삶을 보낸다. 8화에 등장하는 작중의 독백에는 어떤 의미로는 작가가 느끼고 생각하는 1999년 당시를 살아가던 이들에게 바치는 삶의 자세를 농축한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IMF가 들이닥쳤어도 우린 UFO을 탈 거야. 사치스런 낭만이라고 비웃어도 좋아. 모두 우릴 비웃어도 우린 우리 서로를 비웃진 않을 테니까 말이야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자조적인 느낌이 들 수 있는 대사이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서도 자기 고유의 삶의 방식을 놓지 않는 우주인의 모습처럼 외부의 상황과 남들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는 대신, 나만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일종의 선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주인공 우주인, 그리고 작품 <우주인>은 그 선언에 합당한 자세를 보여주며 2022년 현재까지도 간간히 회자되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었다. 여기에 전작들보다도 더욱 간결해진 이향우의 작화는 이전 작품들처럼 동화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주인공의 일상생활만큼 느긋한 감각을 주며 작품이 지닌 분위기를 더욱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든 요소가 되었으리라.

<우주인>이 완결된 이후로 2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 IMF 경제위기는 이미 오래전에 벗어났다. 그러나 남을 누르고 자기 혼자만이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다. 불안한 삶은 일상이 되었고, 그로 인해 초조함을 느끼는 이들 또한 갈수록 늘어난다. 이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공동체의 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계속 각자도생의 정서가 두터워지는 상황에서, <우주인>이 보여준 삶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나 자신답게 살아가기, 그러면서도 남들과 함께 살아가기.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삶의 자세를 이향우는 <우주인>을 통해서 일찌감치 제시하고 있었다. 정말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온 우주인과도 같은 작품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