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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순정’ 기획전 전문가 리뷰2-<신일숙 작가>- 만화연구자 한상정

2023.01.16

아무리 다채로워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최근에 완결한 <카야>를 보지 않은 10대와 20대 독자에게 신일숙은 낯설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 만화 좀 봤다고 하는 50대 독자에겐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이름이다. , 물론 30대나 40대에게도 익숙하겠지만, 50대를 내세운 이유는 순정만화에 대한 각종 편견과 무시라는 풍랑을 함께 넘어왔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특히 <아르미안의 네 딸들(1988-1995, 20)>, ‘A4’라는 별칭까지 가지고 있었던 이 작품의 1권부터 오매불망 기다리던 마지막 권이 나올 때까지의 세월을 인내했던 기억은 여전히 아련하다. 남성 주인공의 보조자로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여성 주인공 중심의 장편 서사라는 점에서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작품이다. 이 외에도 동명의 게임 원작으로도 유명한 <리니지(1993-1996, 10)>, 미스터리 판타지로 규정할 수 있는 <파라오의 연인(1997-2003, 16)> 같은 10권이 넘어가는 장편과, 단 두 권으로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1999년생(1988)>, <에시르자르(1991-1997, 3)> 같은 중편에서 <카르마(1990)>같은 단권 완결작에 이르기까지, 추천작을 고르기 어려울 만큼의 작품이 쌓여있다.

 

그녀를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신일숙 작품에 대한 경험을, 오래된 독자들에겐 되새김질할 추억을 준다는 의도로 선정한 짧은 단편 모음들은 크게 두 타이틀이다. 첫 번째 타이틀은 크리슈티, 19956월 순정만화잡지화이트(White)창간호에 실었던 <크리슈티>, 같은 잡지에 발표했던 <붉은 티란티움의 향기>, 그리고 1989모던타임즈에 게재했던 <정령을 믿으십니까>를 만날 수 있다. 책을 펼쳤을 때의 양면 페이지 연출이 화려했던 그녀의 작품들을 세로 스크롤 방식으로 편집한다고 해도 그 맛이 완전히 살아나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연재물을 읽은 이후 가능하다면 출판만화 버전으로 다시 경험해보길 권한다. 같은 이야기라도 훨씬 더 술술 잘 넘어갈 테니까.

  

<크리슈티>는 이번 연재작 중에서 90년대 신일숙의 화려한 연출을, 환상적이고도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준다. 양면 페이지 가득히 펼쳐지는 크리슈티의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 뒤로 펼쳐지는 파도와 바다가 어떻게 재탄생할지 주목해주면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칸마다 일일이 수작업한 이 배경들도 즐거움을 더해준다. 여기엔 단지 밀당하는 남녀간의 연애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 깊숙이 공통점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이끌림, 그리고 젊은 나이에 죽음을 통해 서로를 독차지하게 된다는 연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떤 독자가 애정을 갖고 있는 주인공이 죽는 것을 바랄까. 하지만 죽음으로써 완결되는 스토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일숙은 필요할 때 주인공 또는 중요한 인물들을 사정없이 죽음으로 이끈다. 역량 있는 스토리텔러라야 할 수 있는 일이리라.

 

<붉은 티란티움의 향기>는 여러 가지 코드들이 섞여 있다. 죽으면서도 남편에게 협박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부인, 마치 그녀가 다시 나타날 것만 같은 공포감, 그리고 실제로 누가 그녀의 역할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추리, 역시나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1999년생>이나 <카르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통념상의 이상적인 여성상이 순종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에 대비, 여성의 강력한 추진력이나 카리스마를 매력으로 느낀다는 설정은 이미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도 익히 드러난 바 있다.

 

<정령을 믿으십니까>는 신일숙의 작품군 중에서 소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시대물이면서 이번 소개작들 중 유일하게 80년대 작품이다. 그녀 작품의 대다수가 서구의 역사나 신화의 활용, 또는 상상력에 의거한 판타지에 해당한다면, 이 작품은 당시 우리나라의 모습이 드러나 보인다. 예컨대 대학 등록금을 삼촌이 내준다고 하더라도 엄청나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으며, 남성이나 여성 대학생들의 복장, 영화감독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판타지가 빠져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조차 반전의 묘미를 제공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나무로 가득찬 숲을 어떻게 묘사해내는지, 칸마다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해나가는지를 보는 것은 이 작품을 다시 만나는 행복함 중의 하나이다.

  

두 번째 타이틀은 리가이아, 신일숙이 1997나인에 연재했던 컬러 단편 <북소리>를 제외하면 1992댕기에 연재했던 11편의 짧은 컬러 단편들을 세로 스크롤로 재편집해서 연재계획을 잡다가 발표하지 않았던 작품이다. 12개의 단편들은 <리가이아><벨르양의 검은 드레스>처럼 원작이 있는 작품군, <천사의 세 얼굴>이나 <히야신스의 기사>, <해신의 아들>, <미녀와 야수>처럼 근원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의 작가의 머릿속에서 탄생했거나 있었다고 하더라도 변형된 작품군, 이와는 달리 그 어떤 원작과도 무관한 <북소리>처럼 완전한 판타지 픽션도 있다. <승마교사>, <카페에서 만났다>, <위험한 거래>처럼 우리가 당연히 생각했던 것을 의심하게 만드는 또는 일상적으로 내뱉는 말의 무게를 실험해보는 작품군이 있으며, <신데렐라가 흘리고 간 것>이나 <만화가와 DJ>처럼 1990년대 분위기를 전달해주는 작품군도 있다.

 

각 묶음 중에서 하나씩만 언급해보자. <리가이아>는 에드가 엘런 포우의 <리지아(Ligeia, 1838)>를 웹툰으로 옮긴 것이다. 사실 문학작품을 만화로 옮기는 건 상당히 위험한 작업이다. 대부분은 원작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의 색채와 리듬을 잃어버리니까. 신일숙은 상대적으로 얼마되지 않는 분량으로 포우의 명성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로 재구성해내는 배짱을 내보인다. 사실 이런 부분이 그녀다운 부분이다.

      <리가이아>

 

<해신의 아들>은 또 어떤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보듯이 질투하는 신이란 특별할 게 없다. 신의 사랑을 받는 이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신의 사랑을 받아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이들이 일찍 이 세상을 떠나 신에게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익숙한가.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라나 인물이 신화나 전설 속에서 등장한 적은 없다. 익숙한 것을 활용하여 새로운 것을 내보이면서도 원래 있었던 것처럼 그럴듯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신일숙의 특기이며, 그녀의 인물들이 살아있는 듯 한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완전한 판타지인 <북소리>는 폐쇄된 공간에 갇힌 반군의 무리 안에서 성욕풀이의 대상이 되어버린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받지 못하던 그녀에게 북소리와 더불어 환영과 환청이 나타난다. 왕비는 그녀의 침실에서 발견한 남자를 애인이 아니냐며 심문하는 파라오에게 모르는 이라고 부정한다. 남자는 석문 뒤의 거대한 맷돌에 갈려 왕비가 손길과 숨결로 자신의 사랑을 인정해줄 때에야 피가 흐를 것이라 예언하며 죽어간다. 환영이 사라지고 그녀가 석문으로 다가가서 만지자 그제야 붉은 피가 흘러넘친다. 이처럼 강렬한 붉은 색이라니.

  

<카페에서 만났다>를 보자. 결혼을 앞둔 남자가 카페에서 애인을 기다린다. 옆자리에 있던 노신사가 아련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카페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을 하는 건 조심해야 한다며. 자신도 그랬지만 5년 주기로 사라지고, 매번 새로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왠지 항상 같은 사람 같다고. 미스터리한 이야기에 빠져있던 남자가 애인을 만나자 왠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신일숙은 익숙한 것을 다르게 보이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카페에서 만났다>

 

  

1990년대 초반의 사회 분위기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작품이 <만화가와 DJ>이다. 오늘날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 비하면 1/5에 불과했던 시대였지만, 잘 모르는 이에게도 기꺼이 손을 내밀라고 교육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다. 모르는 타자를 위한 하얀 거짓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단편이다. 이 작품 역시 반전의 묘미가 반짝인다.

 

사실, 어떤 작품이라도 스크롤을 내리는 순간 곧바로 신일숙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그녀만의 작화 스타일과 화려한 연출, 게다가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면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죽음을 야기하는 몽환적인 사랑이, 오랜 시간을 견뎌야만 하는 멜랑콜리가, 카리스마 넘치는 여성이,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상상력이 풍부한 판타지가 펼쳐지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 페이지를 넘겨보며 읽어나가는 경험을 더 권하고 싶다. 특히크리슈티. 어쩌겠는가, 경험과 취향이 그러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