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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순정’ 기획전 전문가 리뷰1-<김진 작가>-만화연구자 김소원

2023.01.16

유쾌하고 장대하며 우울한, 세 개의 드라마: <레모네이드처럼>, <푸른 포에닉스>, <어떤 새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남쪽으로 날아간다>

 

 

 

1983년 잡지 여고시대에 연재된 <바다로 간 새>로 데뷔한 김진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던 순정만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만화가 중 한 명이다. 김진 작품의 주인공들은 여느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지독한 불행과 마주하거나 어딘지 허술해 웃음을 주기도 한다. 여러 인물의 중첩된 서사가 때로는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작가는 다채로운 작품을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외전으로 소개하는 세 작품은 장르도 분위기도 각각 다르다. <레모네이드처럼>은 유쾌한 가족 드라마, <푸른 포에닉스>는 세련된 SF, <어떤 새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우울한 로맨스이다.

 

시끌벅적 한 씨 연대기 <레모네이드처럼>

<레모네이드처럼>1986년 도서출판 프린스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어 큰 사랑을 받았다. 작품의 인기는 1988<모카커피 마시기>, 1991년 로 이어지는 이른바 한 씨 연대기로 확장된다. <레모네이드처럼>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세상에 남겨진 일곱 남매의 이야기이다. 사회초년생인 장남 재우부터 쌍둥이 모델 서희와 초희, 재수생 윤우, 완벽주의자 진우, 조용한 성격의 난희, 아직 초등학생인 막내 현우까지 일곱 남매에게 부모님의 예상치 못한 죽음은 큰 상실과 충격을 준다. 넓은 집에서 부족함 없이 살던 이들 남매는 충격이 채 가시기 전 비좁은 집으로 이사한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부재가 곧 주인공들의 곤궁한 일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신파 대신 유쾌한 웃음을 택한다. 이 웃음에 큰 공헌을 하는 등장인물은 귀여운 애어른 아기표독이다. 재우의 아들 표독은 때로는 주인공으로 때로는 관찰자로 한 씨 집안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실감 나면서도 코믹하게 보여 준다. 매력적인 일곱 남매와 표독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공감대를 얻었고, 작품의 인기는 몇 편의 외전으로 이어졌다.

<레모네이드처럼>의 외전인 <징우삼쵼의 어느 날>은 일곱 남매 중에서도 가장 까칠한 성격인 진우의 연애담을 조카인 표독과 막내 현우의 시점을 더해 그린 작품이다. <레모네이드처럼> 시리즈는 김진의 다른 작품들과도 결이 다르고 같은 시기 인기를 얻었던 대하 로맨스 순정만화들과도 뚜렷하게 구분된다. <레모네이드처럼>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개성이 지나치게 뚜렷한 일곱 남매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려내는 의외의 웃음과 유쾌한 감동이다.

 

시대를 앞서간 SF <푸른 포에닉스>

<푸른 포에닉스>1988만화왕국에 연재되었던 SF 작품이다. 이후 주간 소년만화 잡지 XEN에서 199912월부터 20006월까지 연재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본편 못지않은 많은 외전이 있다. <샹그리라>(댕기, 1991) , <에레보스 연가>(요요, 1991), <황무지>(마인, 1995), <파누엘 7>(모션, 1998), (나인, 1998), <레테>(Yahoo! mania, 2002) 등이다. 그리고 2016년 네이버와 한국만화가협회가 기획한 한국만화 거장전시리즈의 하나로 선보인 단편 <호모 루덴스><푸른 포에닉스>의 외전 격인 짧은 이야기다. 이처럼 잡지에서 웹툰으로 한국 만화의 중심이 옮겨간 긴 시간 동안 <푸른 포에닉스는> 외전으로 독자들을 찾았다.

SF는 한국 만화의 여러 장르 중 다소 변방에 있다. 순정만화 중에도 SF 장르는 많지 않다. <푸른 포에닉스> 시리즈는 거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류의 암울한 미래를 그린다. <푸른 포에닉스>가 그리는 세상은 디스토피아 그 자체이다. 환경 파괴로 지구는 생명을 만들고 보호할 능력을 상실했고 단순히 비를 맞는 일조차 위험한 황폐한 미래, 인류는 죽음의 별이 된 지구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나선다. <푸른 포에닉스>는 지구와 비슷한 행성에서 살아남은 인류, 그리고 유전자 배합기능에 문제를 안고 만들어진 또 다른 인류 사이에 일어난 우주 전쟁과 반란을 그린 스페이스 오페라이다.

환경 파괴로 멸망한 지구, 우주 전쟁, 슈퍼컴퓨터가 지배하는 세상, 인공적으로 태어나는 인류SF 장르의 익숙한 소재를 잘 조합해 작가는 본편과 여러 외전에서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완성해 나간다. 오래전 세상에 나온 작품이지만, 기본 설정이나 세련된 메카닉 디자인은 지금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 작품이 오랫동안 여러 외전을 통해 독자들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 이유이다.

 

  <푸른 포에닉스>

 

상처 입은 청춘들의 노래 <어떤 새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남쪽으로 날아간다>

<어떤 새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남쪽으로 날아간다>(이하 <어떤 새들은>)는 작가가 성인을 위한 만화로 기획했던 작품이다. <어떤 새들은>은 주인공 유나와 유나의 오랜 친구인 승아, 건희, 승규를 주요 등장인물로 이들의 엇갈린 애정과 상처를 그렸다. 유나는 유명 여배우와 재벌의 불륜으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큰 결핍을 안고 있다. 부모님이 안 계신 승아는 유나 어머니의 도움으로 유나의 집에서 자랐고 승아의 유나에 대한 감정에는 질투가 뒤엉켜있다. 건희는 유나와 비슷한 출생의 비밀과 아픔을 안고 있고 승규는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생존 본능처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다. 경제적인 풍요나 빈곤과 별개로 이들의 상처는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다. 특히 유나와 건희가 가진 상처는 전적으로 이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든 것이다. 유나는 자식이 부모로부터 받는 당연하고도 조건 없는 애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 건희는 아버지에게 완전히 버림받았고 어머니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다. <어떤 새들은>은 상처 많은 아이가 냉소적인 어른이 되는 시간을 그린 작품이다.

<어떤 새들은>의 외전 <몽환>은 본편에서 서사의 한 축을 담당한 세진의 이야기를 보여 준다. 세진의 어머니는 딸을 유명 배우로 만들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있다. 세진은 어머니의 맹목적인 뒷바라지와 톱스타가 되기에는 역부족인 현실의 벽 사이에서 고통 받는다. 유나와 승아, 세진은 연예인이 되어 꿈을 먹어 치우는 짐승과 같은 비정한 세계에 들어선다. 승규와 건희도 이 셋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이 사는 세상이 혹독한 것은 그들이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세상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작품의 메시지는 건희의 독백에서 잘 드러난다.

 

유나

어떤 새들은 말야. 겨울이 오기 전에 남쪽으로 날아가지.

그 새들은 그 겨울을 감당하기엔 너무 준비가 없었어.

겨울은 아무리 보통의 것이라 해도 감당하기가 힘드니까.

(중략)

이 삭막한 어둠 속에그 새들은 왜…….

나는 왜.

우리는 왜.”

 

 

 <어떤 새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남쪽으로 날아간다>

 

 

김진의 작품에는 이렇게 허무가 짙게 배어있는 등장인물이 많다. 여러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독특하다. 김진은 동시대에 활동한 만화가들과 비교하면 발표한 작품의 양도 많고 이들 작품의 장르도 다양하다. SF, 가족 드라마, 역사, 개그, 스릴러 등 많은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창작했다. 김진의 작품 중에는 순정만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어두운 설정의 이야기도 있고 게임과 같이 (연재되던 당시로는) 흔치 않은 소재의 작품도 있다. 이번 기획으로 선보인 세 작품은 각각 그 장르와 주제가 너무나 다른 작품들이다. 특유의 그림체가 아니라면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의심할 정도로 서사의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보여 주는 이야기는 다르지만, 인간 내면에 대한 충실한 묘사와 인물들에 대한 복잡하고도 다층적인 관계의 묘사에서 김진 작품 특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김진은 순정만화의 장점을 살리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작품에 빈틈없이 채워 넣는 작가이다. 세 작품의 외전을 한 자리에서 감상하는 것은 작가의 다양한 작품세계를 엿볼 좋은 기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