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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오늘의 우리만화 <황제와 여기사> "로맨스를 넘어선 인정과 존중" 김경윤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2024.11.29

로맨스를 넘어선 인정과 존중

<황제와 여기사>, 팀 이약, 카카오웹툰



이미지 디앤씨미디어 제공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막대한 돈, 누군가는 거부 못 할 권력이면 사람을 거느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사들인 사람의 마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언제고 더 큰 돈, 더 강력한 권력을 만나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사기 속 고사는 2500년을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

웹툰 '황제와 여기사'에서 아크레아의 왕 룩소스1세는 포로로 잡은 적국의 기사 폴리아나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챈다.

외국인에 여자라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윈터라는 성을 하사하며, 기사로 삼는다.

가문에서도, 자국 군대에서도 멸시받던 폴리아나는 이때부터 새 삶을 산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왕을 만나 혁혁한 공을 세운다.

'황제와 여기사'는 충성스러운 기사와 대륙을 통일하려는 황제의 정벌기이자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고, 스스로도 의심하지 않는 둘의 두터운 관계를 그린 이야기다.

 

 

이미지 디앤씨미디어 제공

 

 

타고난 능력은 없지만 노력하는 사람에 대하여

"짐은 노력가를 좋아하지."

룩소스1세는 전쟁 포로 폴리아나를 자기 휘하에 두기로 결정하면서 이같이 말한다.

이 한마디는 폴리아나의 마음을 흔들어 순식간에 조국을 등지게 만든다.

노력가라는 단어는 폴리아나를 단적으로 묘사한 단어다.

로맨스판타지 장르 여주인공은 대개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어떤 여주인공은 마법을 부릴 줄 알고, 정령을 소환하거나 동물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도 하다. 그마저도 없고 평범한 인물이라면 적어도 회귀·환생·빙의를 통해 미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계책을 세우는 지략가로 묘사된다.

마치 남들은 상상도 못 할 능력이 있어야만 뛰어난 남자 주인공과 어울릴 자격이라도 생긴다는 듯이.

 

폴리아나는 검술이 뛰어나지도 않고, 엄청난 지략가도 아니다. 하다못해 음식 솜씨도 형편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단 하나의 장점이 있다. 바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여자를 배척하는 군대에서도 악착같이 버텼고, 천연 요새를 함락하기 위해 온 마을을 끈질기게 돌며 방법을 찾아낸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충심,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끈질김, 본분을 잊지 않는 성실함이 폴리아나에게는 있다.

타고나기를 최강자라서 어떤 난관도 대수롭지 않게 통과하는 '먼치킨' 설정이 유행하는 요즘, 평범한 이의 노력을 강조하는 이 이야기는 더 귀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미지 디앤씨미디어 제공

 

세련된 여성서사 노블코믹스

노블코믹스와 여성서사가 웹툰계 주류로 자리 잡았다.

2015년 웹소설로 처음 연재되고, 2019년 초 웹소설 기반 웹툰으로 만들어진'황제와 여기사'는 이 두 트렌드의 선두 주자라고도 볼 수 있다.

원작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적재적소에 손을 댄 각색이 눈에 띈다.

주인공 폴리아나는 빡빡 깎은 머리와 부러진 뒤 휘어진 코, 일주일에 한 번 씻으면 다행인 위생 관념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로맨스판타지 웹툰 속 여주인공을 마냥 못생기게 묘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웹툰에서는 박색과 절색 그 사이의 적당한 지점을 찾아서 폴리아나의 얼굴을 그려냈다.

룩소스가 내린 비인간적인 지시도 순화했다. 향후의 로맨스를 위해서 룩소스의 흠결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아크레아 최초의 여기사이자, 처음으로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은 여자인 폴리아나의 이야기는 오늘날 여성들의 이야기기도 하다.

맨 처음에 걷는 여성에게는 압박이 뒤따른다. 크게는 처음 수장이 되는 여성에게도, 작게는 한 회사에서 처음 부장 직위를 단 여성에게도 그 무게는 다르지 않다.

편견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서야 하고, 한 번의 실책은 뒤따르는 모든 여성의 길을 막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황제의 아들까지 낳았지만, 이를 숨기면서 기사의 삶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폴리아나의 모습에서는 '경단녀'의 고민도 읽힌다.

전장에서 활약하는 박색의 여성 이야기는 구전설화 '박씨부인전'과도 닮았지만, 마지막에 아름다운 여인으로 거듭나지 않는다는 점이 더 매력적이다.

 


이미지 디앤씨미디어 제공

 

군신유의, 어쩌면 이것도 사랑이다

'황제와 여기사' 남녀 주인공의 관계를 로맨스로만 해석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룩소스는 대륙 최남단에 이르러 벅찬 승리감을 만끽하던 순간 언제고 자신의 뒤를 지켜온 폴리아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처음에는 이성적인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없던 폴리아나도 룩소스의 구애를 서서히 받아들인다.

 

이 둘의 감정은 불타는 정열과는 거리가 멀다.

룩소스는 "경은 짐이 가장 총애하는 기사, 절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폴리아나는 "이 생명 다 바쳐, 설사 지옥의 불구덩이라도 주군을 위해 뛰어들겠다"고 다짐한다.

이들의 목표도 같다. 대륙의 끝까지 가보겠다는 것은 룩소스의 청사진이자, 폴리아나가 새 삶에서 찾은 목표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는 동지애라고 불러도 무방하고, 충심과 총애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하룻밤 실수로 아들을 낳게 되지만, 둘은 연인이기 전에 왕과 충성스러운 기사였으며, 결혼 뒤에도 이 관계는 달라지지 않는다.

충성심과 애정이 뒤섞인 관계는 서양 중세 문학의 원형인 기네비어와 랜슬롯의 사랑을 거꾸로 뒤집은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모두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눈꽃도 꽃인 것처럼.

 

 

 

김경윤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이미지 디앤씨미디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