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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오늘의 우리만화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뮤지션> "이토록 새롭게 웃긴 ‘퀴어만화'라니" 조경숙 만화평론가
2024.11.08
이토록 새롭게 웃긴 ‘퀴어만화'라니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뮤지션>, 들깨이빨, 카카오웹툰
언젠가 인터넷에서 그런 글을 봤다. 글이나 그림, 공부 등은 노력을 기울이면 그만큼 더 나아질 수 있지만, 사람을 웃기는 개그감만큼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야 한다고. 주변을 수시로 웃기는 사람들을 일명 '웃수저'라 부른다고 한다. '금수저', '흙수저'에서 파생된 단어로, 주변에서 웃기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데다 본인조차 웃기는, 아무튼 웃기는 데에는 재능이 있고 도가 튼 사람을 일컫는다고. 이 단어를 보자마자 떠오른 작가가 있다. 이세계물의 표현을 빌리자면 'SSS급의' 개그감각을 가진, 들개이빨 작가다.
작가의 전작인 <먹는 존재>, <족하>, <홍녀> 모두 훌륭한 작품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뮤지션션(이하 부내죽)>처럼 웃기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그냥 웃긴 만화가 아니다. 무려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승인받지 못한 퀴어를 소재로 쉴 새 없이 개그를 선보인다. 고백하자면, 헤테로(정확히는 ‘뼈테로’) 여성을 유혹하여 퀴어의 영역을 넓힌다는 뜻의 ‘광개토부치’를 본 순간엔 거의 숨도 못 쉴 정도로 웃느라 머리가 띵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대단했던 건, 이 모든 게 웃기면서도 그 어느 부분 하나 기분 나쁜 구석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토록 적나라한 대사들을 구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 어느 단어 하나에도 멸시나 비하가 개재되지 않는다. 손쉽게 무시하거나 비꼬지 않고 이토록 신랄하게 웃길 수 있는 감각은 들개이빨 작가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다.
이미지 카카오웹툰 제공
퀴어, 그중에서도 여성 캐릭터 간의의 사랑을 그리는 GL 만화는 대개 무게감 있는 정서를 가지곤 한다. 지금의 차별적인 한국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어, 작중 세계관도 동성애에 우호적이지 않아 캐릭터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고 감정을 숨기려 애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마음에 주체할 수 없이 이끌려 사회적 규칙을 위반한 것처럼 비밀스레 사랑을 나누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전통적인 GL 서사의 특징이다.
그러나 들개이빨 작가의 <부내죽>만큼은 이와 상반된 길을 간다. 헤테로 로맨스만을 근본으로 여기는 차별적 인식을 몰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인식들이 얼마나 헐거운 모래성 위에 올라가 있었는지를 폭로하듯, 쿡 찌르기만 해도 혼돈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모습들을 우스꽝스럽게 전시하며 GL 특유의 무게감에서 손쉽게 벗어난다. 다만 '유령'의 정체성 혼란기에 관한 고민만큼은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는데, 전체적인 작품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변신 립스틱이라는 새로운 '만화적 허용'으로 돌파한 연출은 정말이지 일품이다. "작가님,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라는 작중 ★의 대사를 정말이지 돌려주고 싶다.
물론 그렇다고 이 GL에 고뇌가 없는 건 아니다. <부내죽>은 정체성 고민에 힘을 쏟는 대신 '유유령'과 '★'의 관계에 자꾸만 달라붙는 거추장스러운 이름표들을 떼어내는 데에 집중한다. 뮤지션과 만화가, 한남동과 등촌동, 연상팸과 연하공...그 모든 것을 떠나 강원도 어귀에서 연인으로 만나기까지 유유령과 ★은 끊임없이 관계를 전복한다. 마치 가부장제가 대강 차려놓은 로맨스 밥상을 통째로 뒤엎듯이.
도무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 좌충우돌 로맨스에는 매우 독특한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이 웹툰이 픽션과 논픽션의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유유령의 직업은 웹툰 작가이고, 필명은 '들빨개빨'이다. 게다가 '들빨개빨'의 전작은 무려 <먹존는재>다. 이러한 설정에서 알 수 있듯, 유령은 들개이빨 작가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실제 작가의 정체성, 모습 등이 캐릭터에 상당히 녹아든 탓에 매화 이 만화의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또 어디부터 논픽션인지를 궁금해하는 댓글이 우수수 달리곤 한다. 그러나 그런 호기심을 약 올리기라도 하듯, 정작 들개이빨 작가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맛집에서 양념장 비율은 말하지 않잖아요. 저도 실화 비율은 죽을 때까지 얘기하지 않으려고요. 다들 끝까지 궁금하도록….” 실화인지 여부를 이번엔 '맛집 양념장 비율'에 비유하다니, 인터뷰에서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명실상부 '웃수저'의 품격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픽션과 논픽션을 경계 짓지 않고 그사이를 수없이 넘나들다 못해 종래에는 작가인 듯 아닌 듯 새로운 세계 속의 본 적 없는 캐릭터가 탄생해 버린 이 세계관이야말로 <부내죽>의 독보적인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픽션 요소를 넣었다 한들, 작가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반영한 만큼 이토록 캐릭터의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긴 어려울 텐데도 <부내죽>은 망상부터 성찰, 성애와 도 넘은 주접까지 몽땅 하나의 바구니 안에 멋들어지게 담아냈다. 이 만화를 어떤 장르로 불러야 좋을까. 퀴어, 레즈, 개그, 자전, 일상, 로맨스. 무엇 하나만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고, 여러 개를 나열한들 이 만화의 모든 부분을 포함한 것 같지 않다. 장르조차 그저 '들개이빨' 그 자체인 이 작품을 통해 퀴어 서사와 일상툰, GL 만화가 조합된 새로운 영역을 만난 것만 같다.
그런즉 <부내죽>은 '오늘'과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만화다. <부내죽>이 그려내는 캐릭터와 배경, 대사 하나하나가 지금 우리 사회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데다, 우리가 여태 기대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야기로 ‘오늘’을 새롭게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부내죽>의 여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음에도, <부내죽> 이후 들개이빨 작가의 시선과 미감을 통과해 새롭게 그려질 또 다른 오늘의 만화가 벌써 기다려진다.